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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영화

영화 [밀양]-용서에 대하여

그 때가 아마 내가 대학교 2학년 때였을 것이다. 짧은 머리를 하고 즐겨 입던 원피스를 입고 귀에는 무려 테디베어 귀걸이를 즐겨 했던 2007년의 봄이었다. 학교 수업은 혼자 듣는 경우가 잦았다. 부전공이 철학이었고, 흔히 영어를 선택하는 필수 실용 외국어는 동기 중 혼자 일본어였다. 그래서 대학 친구들은 따로 시간을 내어 만나거나 전공 시간에나 만났다. 수업이 혼자 끝나서 혼자 교문을 나오는 경우가 잦았다.

그 날은 햇살이 강하고 따뜻했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수업이 드물게 일찍 끝난 날이었다. 이대로 집에 가기 아쉬웠다. 딱히 다른 일정도 없었다. 무작정 강남행 버스를 탔다. 버스에서 내려서 고개를 들어 보니 cgv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햇살에 눈을 찌푸리며 잠시 그 빨간 간판을 응시하다가 이내 영화관 안으로 들어갔다.



시간이 가장 빠른 영화는 [밀양]이었다. 판매 창구에서 표 하나를 사고 근처 커피숍에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샀다. 조각케익이 맛있어 보여 잠시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나는 상영관 안으로 들어갔고, 이내 정장을 입은 남자가 내 옆에 앉았다. 상영관 좌석은 거의 만석이었다.

남편도, 자신의 커리어도 잃은 슬픈 눈빛의 여자가 어린 아이를 데리고 남편의 고향으로 와서 작은 피아노교실을 운영한다. 어느 날 아이가 납치되고 며칠 후 주검으로 발견된다. 범인은 믿고 맡겼던 어린이집의 인상 좋은 원장 선생님. 서울에서 온 집안이라 분명 돈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범죄를 계획했던 것이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아마 서울에서 온 여인과 아이에 대해 작은 시골마을에서 뒷 이야기가 도는 것을 묘사한 장면이 나왔던 것 같기도 하다.
아이마저 허망하게 잃은 여인은 그야말로 정신을 놓은 삶을 산다. 그러다 우연히 들어간 동네 교회에서 다른 사람들이 울며 기도하는 모습을 생경하게 바라보다가 이내 동화되어 십자가 앞에서 펑펑 눈물을 흘린다. 그녀는 하나님 안에서 다시 그리고 겨우 자기 삶의 위치를 확인한다. 모든 것이 치유되었거나 치유되고 있다는 생각에 그녀는 조금씩 자신의 삶을 추스린다.

어느 날 그녀는 큰 결심을 한다. 바로 자신의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하기로 한 것이다. 솔직히 자신은 없지만 하나님과 함께라면 할 수 있을 것만 같다며 작은 주먹을 움켜쥔다. 면회실에서 다시 마주한 그녀와 범인인 어린이집 원장. 치밀어오르는 분노와 원망을 겨우 움켜쥐며 그녀는 원장을 바라보다가, "그런데 원장님 얼굴이 좋아 보이시네요." 라고 어렵게 말문을 뗀다. 그러자 원장은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대답한다. "네. 하나님께서 저를 용서해주셨거든요. 저는 지금 새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 때 전도연의 인생에서 모든것이 와르르 무너지는 절망감을 표현한 연기는 더 이상 연기가 아닌 그 무엇이었다. 겨우 쥐고 있던 한낱 삶이 와장창 깨어져 버리는 듯한 절망. 배신감.

그녀의 삶은 이전보다 더 수렁으로 빠진다. 교회 장로를 유혹하여 성관계를 맺으며 하늘을 바라보며 "보고 있어? 보고 있냐고!!" 하며 광기어린 눈물을 흘리는가 하면 자해를 하기도 한다. 그녀에겐 너무나도 어려웠던 용서가 그 범죄자에겐 너무나도 쉬웠던 것이다. 그녀는 용서란 너무나도 상대적이고 자의적이어서 차라리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옳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사람은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본다. 그래서 이 작품을 만든 감독이 "이 영화는 사랑 이야기입니다."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눈에는 "용서의 이야기"로만 보인다. 용서는 불가능하다. 나는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용서의 과업을 신에게 맡긴다. 물론 나는 신적 존재에 회의적인 사람이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