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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를 받지 않을 권리

다 보면 절대 완벽하지 않은 사람들이 모이는 이곳이라 때론 실수를 하기도, 당하기도 하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만나 상식 이하의 일을 당하기도 하고 선의의 도움을 얻기도 한다. 많은 경우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어떤 어그러짐이 있을 때 누군가는 사과의 말을 건네거나 누군가는 그 사과를 받아줌으로써 다시 그 어그러짐을 되돌려 놓고는 한다. "비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속담은 이 경우에 자주 인용된다. 일종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만드는 성장통과 같은 어그러짐. 이는 잘못을 한 사람의 철저한 반성과 피해를 입은 사람의 너른 이해심으로 -물론 많은 경우 쌍방이겠지만- 충분히 회복 가능한 영역에 속한다고 본다.
하지만 어떠한 극단적인 일을 겪고 누군가가 더 이상 상종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판단이 섰을 때, 우리는 모종의 관계를 종결할 권리를 갖는다. 비단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지극히 일상적인 관계 내에서 뿐만이 아니다. 성폭행범과 피해자 사이, 정치인과 유권자 사이, 가치관이나 도덕개념이 전혀 맞지 않는 사람과 사람 사이 등. 도저히 관계를 유지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경우 우리는 이 관계를 종결할 수 있다. 물론 "인연은 소중하"고, "세상이 너무나도 좁아"서 "사람 일은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지만, 적어도 관계가 어그러진 상태를 굳이 이전의 좋은 관계로 회복시키지 않고 방치 혹은 무시할 권리가 우리에겐 있다.

물론 내가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최근에 내게 이런 고민을 하게끔 하는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삶의 터전에서 촉발하는 고민들은 참 재미있다. 멍청한 나의 뇌를 트레이닝시켜주는 고마운 매 사건의 일어남.
가까이 지내던 사람이 내 가치관과 맞지 않는 행동을 하고 다녔고 나에게까지 피해를 입히자 나는 이 사람이 더 이상 가까이 할 사람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그는 그의 문제적 행동들을 "실수"라 칭하며 내게 "사과"하며 말로써 문제를 "풀기"를 바랐다. 하지만 내 판단에 의하면 문제가 되었던 그의 행동은 "실수"가 아닌 그 사람을 구성하고 있는 "성질"이었다. 이러한 "성질"은 전혀 "사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거친 비유를 하자면, 마치 습관적으로 쾌락을 위해 사람에게 상해를 입히던 사람이 그러한 폭력적인 성향에 의해 발생한 사건을 "실수"라고 칭하며 일련의 일에 대해 "사과"하는 것과 같다.
어찌 되었건 그는 내게 "사과"를 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과할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데 난 사과를 하는 것과 사과를 받는 것은 전혀 별개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많은 경우 사과를 하고 받는 일이 그저 짧은 시간 간격을 두고 발생하기 때문에 이 둘이 당연히 하나로 결합된 사건으로 인식되긴 쉽다. 이 둘이 전혀 다른, 별개의 일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를 쉽게 표현하자면, 나는 사과와 선물, 사랑의 고백은 같은 성질의 것이라고 인식하는데, 이 셋은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동일하지 않고, 선의에 의해 행한 행위라도 받는 사람은 그 선의에 딱 맞는 기쁨을 느낄 ​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 마치 고양이가 자신이 사랑하는 주인을 위해 쥐를 갖다 바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앞서 언급한 두 가지 이유, 즉, 1. 사과로써 "풀어낼" 성질의 일이 아니라는 점, 2. 사과를 받는 사람은 나이니 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점에 의해 나는 이 사람의 사과를 받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사이의 어그러짐은 유지되고 있다.
혹자는 사이를 회복하지 않는 나에게 아직 어려서 그런다고 하고, 멀리 볼 줄 모른다고 비난할 수 있다. 뭐,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선 실제로 이 비난이 행해졌을 것이다. 물론 표면적으로 이 사과를 받아 정치적으로 더 나은 입지를 취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건방지고 신경질적인 이미지보다는 관대하고 속 깊은 사람이 되어 있을 수도 있었겠다. 뭐, 내 인격이 여기까지겠지. 타고난 좁은 마음은 어쩔 수 없겠지. 많은 사람들을 겪으며 나는 더 이상의 피곤한 관계를 갖는 것이 싫다. 그리고, 어차피 부족한 인생들이 모닥모닥 모여 사는 곳에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정치적 입장을 찾나 싶다.

덧. 최근의 이 문제를 아는 사람들 대부분은 내게 "그 사람이 너한테 사과는 했어?" 라고 묻는다. 문제의 본질이 사과를 하고 안 하고가 아닌데. 사과는 했고 나는 이 사람과 다시 잘 지낼 의향이 없다고 말하면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이 돌아온다. 이제 네 차례인데 리액션을 왜 하지 않느냐고 묻는 것만 같다. 난 이 관계를 굳이 회복하고 싶지 않을뿐인데. 이 일로 상처를 받은 건 난데. 무엇보다 난 사과를 받지 않을 권리를 갖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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